영화 '서울의 봄'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 사건 중 하나인 '1212 군사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한 만큼 영화 속 등장인물 또한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졌습니다. 영화 속 진압군으로 나오는 이태신, 정상호, 김준엽, 공수혁, 김오랑의 실존 인물들은 누구이며, '1212 군사 반란' 이후 어떻게 살아왔을까요?
목차
영화 배경 : 1212 군사 반란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입니다. 당시 육사 출신으로 이뤄진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친 중대한 사건입니다.
1212 군사 반란의 배경
1212 군사 반란 당시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암살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영화 남산의 부장들 참고)권력 공백으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성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들의 군사적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10.26 사건과 실존 인물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10.26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남산의 부장들의 배경이 되었던 10.26 사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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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 반란의 성공 요인
1212 군사 반란의 성공은 여러 요인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 당시 반란 주도 세력은 철저한 계획과 조직적인 실행력을 바탕으로 반란을 실행했습니다. 여기에는 실절적으로 군을 장악하고 있던 '하나회'라는 조직의 힘이 컸습니다.
-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부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통신망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통신망 장악으로 반란군은 진압군의 작전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 기존 군 지휘부의 방어와 대응이 미흡했습니다. 확전을 우려한 군지휘부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역사적 평가
문민정부 시절 '1212 군사 반란을 주동한 전두환, 노태우는 반란수괴 등의 죄가 인정되어 1심에서 각각 사형과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항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을 받았습니다.
'1212 군사 반란'은 불법적 권력 장악과 인권 유린의 시작점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후퇴를 일으켰다고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진압군 실존 인물
영화에서 진압군인 장상호, 이태신, 김준엽, 공수혁, 오진오는 반란군에게 끝까지 저항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이들은 실존인물로 각각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헌병감 김진기, 특전사령관 정병주, 김오랑 중령을 표현했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 장태완

장태완(영화 속 이태신, 정우성 배우)은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새천년민주당 소속 전직 국회의원입니다. 6.25 전쟁 당시 향로봉 전투에 참전하여 926 고지 탈환에 기여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맹호부대 1진으로 파월되었고, 제1야전군 사령부 작전처 차장보직에서 근무했습니다.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되어 근무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극상을 벌인 '하나회'소속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 보낸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장태완은 이후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26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육본 교육참모차장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장태완은 12.12 군사 반란 당시 서울에 있던 부대 중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과 함께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결국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반란 이후 그는 서빙고에서 조사를 받았고, 1980년 예편하여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이후 장태완은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임명되었고, 정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의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전두환 정부 시절, 그의 가족들은 불운한 일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는 과음으로 별세했고, 외아들 장성호는 행방불명된 후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장상호 - 정승화
정승화 (영화 속 장상호, 이성민 배우)는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 정승화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었습니다. 10.26 사건 이후 계엄사령관으로서 국가의 안정과 질서 유지에 앞장섰으나,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국군 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모욕적인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한, 1980년대 초반 국방부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이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정승화는 노태우 정부 하에서 예비역 대장의 자격을 되찾고, 몰수됐던 급여와 군인 연금 수급권도 돌려받았습니다. 1993년에는 군사 반란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등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정승화는 2002년 6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헌병감 김준엽 - 김진기
김진기 (영화 속 김준엽, 김성균 배우)는 대한민국 육군의 장군으로 최종 보직은 육군본부 헌병감 겸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이었습니다. 평양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6.25 전쟁 직전에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했습니다. 이후,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보국훈장 삼일장, 천수장, 화랑무공훈장, 베트남 1등 무공훈장 등을 수훈받았습니다.
그는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작전을 직접 지휘했습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초기 신군부에 의해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어 있었고, 이를 인지한 뒤 군사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예편 후에는 수원에서 농사를 지었으며 보문도에서 광어양식업을 했지만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영국 전략문제연구소와 일본 평화안전보장연구소에서 국제관계 및 지정학을 연구했습니다.
1987년 11월에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신군부의 만행을 폭로했으며, 90년대 문민정부 시대가 열리자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1993년에는 예비역 장성들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습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특전사령관 공수혁 - 정병주
정병주 (영화 속 공수혁, 정만식 배우)은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하여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여러 중요한 군직을 역임했습니다.
12.12 군사 반란 당시에는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3명의 장성 중 한 명이었습니다. 12.12 당시 특전사령부 소속 중 자신이 가장 아꼈던 직속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킨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으나 마음을 잡고 대응을 시도했습니다.
반란군에 의해 체포되기 전까지 그는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저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강제 예편을 당하게 됩니다. 반란 이후 그는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으며,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습니다.
정병주는 강제 예편된 이후 명동성당을 다니며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988년 실종된 이후 약 5개월 만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살로 결론지어졌으나, 그 배경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습니다.
특전사 오진오 소령 - 김오랑
김오랑 (영화 속 오진오, 정해인 배우) 은 육사 25기로 임관한 인물입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으며, 특히 1979년 12.12 군사 반란 당시에는 진압군 측인 육군 특수전 사령관 정병주 소장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다가 교전 중 전사했습니다. 그의 희생은 높이 평가받아 1990년에 1계급 특진하여 중령으로 추서 되었습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김오랑 중령의 양친은 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 화병으로 사망하였고, 아내 백영옥은 김오랑 중령의 사망 당시의 충격으로 결국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백영옥은 이후 생계를 위해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생활하며, 복지 시설에서 전화 상담 봉사 활동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김
김오랑과 백영옥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며,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보류되었습니다. 아내 백영옥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불교 자비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실족사로 처리되었으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백영옥의 사후, 그녀는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으며, 친정 오빠들에 의해 화장 처리되어 부산 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초기 대응과 과감함
영화에서 보였듯이 '1212 군사 반란' 당시 군 수뇌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상황 파악하느라 확전을 염려해 소심히 대응했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지만 만약 이때, 제대로 대응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더 빨리 오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듭니다.
'서울의 봄'은 단순한 역사 영화를 넘어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픈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텔링과 강력한 캐릭터는 관객의 높은 몰입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이제 영화관이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서울의 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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