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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한 병에 담긴 전쟁: 영화 소주전쟁과 진로 이야기

by 뉴스 알리미 (NewsNavigator) 2025. 9. 21.

청량하고 독한 그리고 눈물겹게 익숙한 한 병의 술. 영화'소주전쟁'은 한 기업의 흥망성쇠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외환위기라는 격랑 속에서 국민의 술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과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소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지나온 1997년의 상처이자 우리가 아직도 잊지 못한 감정의 잔상이다.

사람 키 만한 소주병 17병이 사선으로 놓여있고 그 사이사이 주조연 배우 4명이 있다.
영화 소주전쟁 포스터

 


1. 술잔 너머로 바라본 전쟁

1997년 겨울 거리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모든 뉴스가 외환위기라는 단어를 반복하던 그 시절. 누군가는 회사를 잃었고 누군가는 가족을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모든 것을 걸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 모든 순간 한 잔의 소주가 있었다. 소주전쟁은 바로 그 한 병의 술을 둘러싼 정치, 경제, 감정의 집합체다

 

IMF 여파로 이름을 잃어가던 국민 기업 ‘국보소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내부 인물들의 갈등과 선택 그리고 외국 자본과의 첨예한 협상이 얽혀 들어간다. 이 영화는 기업 영화가 아닌 사람의 이야기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 선택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작아지는지 얼마나 애처로워지는지 보여준다.

 

 

2. 영화 〈소주전쟁〉 이야기

줄거리 요약

1997년 IMF 외환위기. 대한민국 대표 소주 회사 ‘국보소주’가 경영 위기에 빠지며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회사를 지키려는 재무이사 표종록(유해진)과 회사를 인수하려는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직원 최인범(이제훈). 처음엔 완전히 상반된 입장에서 서로를 경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은 ‘소주’라는 매개를 통해 묘하게 얽힌 감정선과 신뢰 그리고 갈등을 쌓아간다.

표종록이 방송국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있다.
인터뷰하고 있는 표이사

 

회사란 무엇이며 자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은 무엇을 지킬 수 있는가.

 

'소주전쟁'은 기업 인수합병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욕망과 책임, 배신과 연민이 교차하는 감정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결국 국보소주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남겨진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영화는 그렇게 자본주의의 본질과 인간 존엄 사이에서 끝내 답을 유예한다.

 

주요 인물들

⊙ 표종록(유해진): 회사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국보소주 재무이사. 정과 책임, 그리고 회사라는 공동체에 대한 집착이 깊다.

소주잔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는 표종록 앞에는 최인범의 뒷모습이 보인다.
주인공 표종록

 

⊙ 최인범(이제훈): 철저한 자본 논리를 따르는 외국계 사모펀드 실무자. 하지만 그의 이면에는 흔들리는 인간성이 숨어 있다.

쇼파에 앉아서 옆을 보고 있는 최인범
주인공 최인범

 

⊙ 석진우(손현주): 국보 회장(창업주의 아들). 회사가 외국계 자본에 넘어갈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재산만 지키려는 리더.

양주잔을 들고 있는 석진우
석진우

 

3. 실제 모델: 진로

진로, 그 시작

1924년 설립된 진로는 오랜 시간 '국민 소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진로 탁자에는 배신이 없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소주는 사회의 감정 해소제이자 풍경의 일부였다. 진로의 녹색 병은 술을 넘어 한국인의 '서민성' 그 자체였다.

 

진로그룹의 몰락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진로는 무리하게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건설, 금융, 무역 등 비주류 영역에 손을 대며 내부 재무 구조가 악화됐고 결국 IMF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1997년 11월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던 그 순간 진로 역시 구조조정 대상이 된다. 진로그룹은 19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국민 소주’는 주인을 잃는다.

 

골드만삭스와의 갈등: '솔퀸'의 실체

영화 '소주전쟁'에서 '솔퀸'은 국보소주 인수에 나서는 핵심 세력이다. 이 설정은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 ~ 99년 진로의 부도 직후 골드만삭스는 구조조정 컨설팅을 명분으로 진로 내부 정보를 입수했고 이후 그 정보를 활용해 진로의 부실 채권을 헐값에 매입한다.

 

문제는 그 이후다. 진로가 자력 회생을 시도하던 와중 골드만삭스는 최대 채권자의 지위를 앞세워 진로를 법정관리 상태로 끌고 가려했고 이는 진로와 골드만삭스 사이의 법정 다툼으로 이어진다. 법원은 골드만삭스의 법정관리 신청을 기각했고 진로는 가까스로 회생의 가능성을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미 회사의 중심은 흔들렸고 그 틈을 타 이후 하이트의 인수전이 시작된다.

 

하이트맥주의 인수

2004년 하이트맥주가 진로 인수를 선언한다. 맥주 업계 2위였던 하이트는 소주 시장 진입이라는 도전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 2005년 공정위는 유통망 분리 조건으로 하이트의 인수를 승인했고 '하이트진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자본 구조도 운영 방식도 경영 철학도 완전히 달라진 새로운 기업이 된 것이다.

 

 

4. 영화와 현실, 그 사이의 거리

'소주전쟁'에서 국보소주가 진로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또한, 표종록은 실제 진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 매각에 반대했던 내부 인사를 연상시킨다. 최인범은 국내 M&A를 주도했던 외국계 펀드 매니저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심지어 '석진우'는 당시 진로의 오너 가문과 겹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가 아니다. 극적 구성을 위해 과장된 감정선, 허구의 전개과 허용된 픽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실제보다 더 진하다. '소주전쟁'이 보여주는 것은 팩트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마음이다.

 

 

5. 그리고 남은 술 한 잔

지금 마시는 하이트진로 소주병은 익숙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2000년대 초반 이름을 지키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좌절이 담겨 있다. 그 익숙함은 그래서 조금은 슬프다. '소주전쟁'은 그런 감정을 상기시킨다. 지키려 했지만 지켜지지 못한 이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려놓은 자존심. 그리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모두의 상처가 되어버린 이야기.

 

 

에필로그: 소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다

'소주전쟁'은 단지 한 기업의 부도와 인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고비이며 그 안에서 함께 무너졌던 정서, 기억, 공동체에 대한 아픈 기록이다. 술 한 잔 앞에서 쉽게 털어놓고 쉽게 웃으며 쉽게 잊는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술로 아무리 희석해도 끝끝내 남는다. '소주전쟁'은 그런 기억을 다시금 꺼내 마주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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